세평 하늘 아래서 만나는 눈꽃 세상, 경북 봉화 '승부역'

  • 조선닷컴 미디어취재팀 황인식 기자

  • 입력 : 2013.01.02 18:50 | 수정 : 2013.01.03 11:20

    우연히 바라본 창밖으로 눈이 내린다.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는 세상을 바라보면 그리운 이가 더욱 그리워진다. 이처럼 새해에는 북적거리는 스키장을 벗어나 조용한 설국(雪國)에서 두근거리던 설렘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함박눈이 내린 12월의 끝자락에 설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경북 봉화의 '승부역'으로 향했다.

    눈 쌓인 승부역으로 열차가 진입하고 있다.

    승부역은 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오지에 있기 때문에 청량리에서 영동선을 타는 편이 낫다.  지난 1999년부터 눈꽃 관광 열차가 운행돼 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편하고 운치도 있다. 철컹철컹~좌우로 흔들리는 차창 옆으로 하얀 세상을 스쳐지나 승부역에 도착했다.

    "여서 머 구경할 게 있는 줄 알고 오셨으면 잘못 오신 깁니다."

    승부역에 내려 명소를 묻자 김진희 역장이 말했다. 아차! 싶어 당황하자 그는 "여는 즐기러 오는 거지 뭐 볼 게 있어서 오는 게 아닙니더.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되니까 함 둘러보이소."라며 웃어 보였다.

    승부역은 조용히 눈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역장의 말처럼 승부역에는 '구경거리'가 없다. 맛집도, 이색 체험도 없다. 하물며 기차역에 대합실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승부역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 특별함은 역사를 벗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자연스레 알 수 있다.

    기삿거리를 찾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비로소 자연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스마트폰이라도 봐야 하는 일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언제였을까.

    '뽀도독~뽀도독~'. 주변이 조용하니 눈 밟는 소리가 귓가에 더 크게 맴돈다. 역 앞에는 얼어붙은 낙동강이 펼쳐져 있고, 저 멀리 앞산은 빈틈없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승부역은 눈이 닿는 모든 것이 '자연'이었다.

    승부역 앞에서 가족들이 눈싸움을 즐기고 있다.

    눈을 즐기려고 스키장이나 눈썰매장 등을 찾는다만 이곳 승부역에서는 진짜 '눈'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

    승부역에서 눈 쌓인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영암선 준공비'다. 이곳은 역에서 승부마을 쪽으로 50m만 가면 오를 수 있다.

    이 작은 언덕에서는 눈 덮인 승부역 주변과 앞산의 모습은 물론, 터널을 통과하는 열차의 모습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영암선 준공비'에서는 눈 쌓인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준공비에서 승부역을 내려다보던 이기호(50·수원시 매탄동)씨는 "50대의 새로운 삶을 맞이하고자 이곳을 찾았다."며 "이곳에 오니 마음이 정리되고 의욕이 넘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김성현(40·영주 하망동)씨가 "나는 40대를 맞이하러 왔는데 인생 선배를 만났다."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때마침 준공비에서 내려다본 철교 위로 열차가 지났다. 승부역으로 들어서는 오후 관광열차에서는 서울 및 수도권에서 온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내렸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역 앞에 하얗게 쌓인 눈밭에서 사진을 찍고,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단풍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저마다 눈을 즐기는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진을 찍는 곳이 있다. 그곳은 승부역 상징석. 예전 역장이 썼다는 상징석에는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상징석 앞에서 사진을 찍은 관광객들은 저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도 재밌다.

    이러한 '세평의 하늘' 아래는 작은 단풍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에는 얽힌 이야기가 있다.

    1970년대 강릉에서 일하는 영주 남자와 영주에서 일하는 강릉 여자가 있었는데, 이 둘이 일요일이면 승부역에서 기차가 교행하는 5분 남짓 동안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탄광에서 일하던 남자가 사고로 숨지자 곧이어 여자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를 위로하기 위해 역무원이 단풍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승부역 주변을 걷다 보면 승부 현수교를 건너게 된다.

    눈꽃세상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어느새 다시 열차에 올라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 사람들은 단풍나무 아래 자물쇠를 걸고, 사랑을 기원하며 열차에 몸을 실었다.

    승부역을 방문한 권세미(25·경기도 시흥시)씨는 "별다른 기대 없이 그냥 바람이나 쐴 겸 왔는데 눈 쌓인 경치가 무척 예뻐서 깜짝 놀랐어요."라며 "친구들과 사진도 많이 찍고, 복잡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철도공사에서는 12월부터 2개월 동안 승부역까지 가는 '눈꽃열차'를 운행하고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코레일(www.korail.com)로 문의하면 된다.